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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의 문학공간

[윤영의 문학공간] 모시떡 제사가 있는 풍경

[349호] 입력ㆍ발행 : 2017-08-22

찬물을 끼얹고 나왔지만, 여전히 숨 막힌다. 숨통이라도 트일까 싶어 얼음 몇 조각을 삼켰다. 비로소 몸에 냉기가 돈다. 며칠 전 괜스레 친정엄마한테 투정 부렸던 일이 떠올라 마음이 편칠 않다. 음력 유월 열하루, 시할머니님 제삿날이었다. 따지고 보면 엄마에게 퍼부을 이유가 없었다. 혼자서 탕국 세 가지를 끓이고 나니 녹초가 되어 버렸다. 또한 여름 제사가 많다 보니 쉬이 지칠 무렵이었다.
그 해 엄마는 나의 결혼식을 그리 반기지는 않았다. 자그마한 덩치로, 유난히 제사 많은 집안 며느리로 보내려니 오죽했겠는가. 족히 한 달에 한 번 꼴로 제사를 모시는 경주 최씨 집안의 남자를 만났으니 말이다. 탐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힘들어도 어쩌냐. 여자는 자고로 그 집 귀신이 되어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해야 하느니라. 제사를 잘 모셔야 아픈 법도 없는 법이니라.’라고 밥먹듯 읊었다. 그 일은 마치 당신이 양자로 입양되어 온 아버지를 만나 고달픈 삶을 살아냈던 자신을 보는 듯해서는 아니었을까.
내가 자란 마을은 면면히 이어져 온 씨족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농사보다 정작 제사 모시기에 더 바빴다. 여인네들은 분분한 겨울이 오든 삼복더위든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외려 숙연함마저 들어 보였다. 그렇게 친인척들의 힘듦을 보고자란 나는 제사 많은 집은 절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사는 일은 뜻대로 되지 않나 보다.
문득 어린 시절 제사 풍경이 떠올랐다. 나는 제사를 모시는 날 아침이면 유독 바빠졌다.
“해 달기 전에 어여 따오느라.”라는 엄마의 한마디는 어명보다 무서웠으니. 쏟아지는 잠과 싸워가며 반쯤 감긴 눈으로 모시이파리를 따러 가는 길은 새벽과 아침 사이였다. 때로는 성성한 아침별이 희끄무레하게 졸기도 했다. 이른 아침 어렴풋한 산의 능선은 중중첩첩을 지워가며 몸을 섞는다. 영미 아버지 서책 읽는 소리가 한뎃길로 난 쪽문에서 들려오고 모퉁이를 돌아가면 보리수와 개살구가 제법 익었다. 간밤에 비라도 내리고 난 아침이면 뽕밭은 유난히 파랬다.
갈팡질팡 걸음으로 걷다 보면 작은 도랑이 흘러가는 천변에 닿았다. 딱 내 손바닥만 한 어린 모시잎들이 닥나무 사이에서 흰빛으로 파닥거렸다. 이슬을 털어가며 따다 보면 소매에서 시작한 물기가 팔꿈치까지 젖어 올라가는 일은 예사였다. 움츠리고 있던 벌레에 놀라 뒷걸음질 치다 보면 벌건 지렁이가 퉁퉁 불어 뒤집어져 있었다. 잠이 확 달아난다. 깻잎보다 도톰한 이파리는 어린 손에 금방금방 차오른다. 키가 닿지 않는 부분은 깨금발을 하고 가지를 끌어당겨야 한다. 나는 이 일이 후세에 대단한 업적이라도 남겨줄 것처럼 비장한 손놀림으로 용을 썼다. 워낙 손이 재발라서인지 이내 소쿠리는 묵직해진다. 어명이 끝나는 순간이다.
수업을 마치고 해당화 짓이겨 소꿉놀이에 놀다 오면 잠실 앞에선 할머니와 엄마가 세간살이를 정리하며 저녁 제사 모실 준비에 여념이 없다. 참기름 촤르르 발린 모시떡이 삼베보자기에 가지런하다. 읍내 근방에서 과수원을 하시는 작은 고모 내외와 큰 고모님 내외까지 오셨다. 여남은 식구가 불어났건만 제사는 잔치 분위기였다. 유난히 흥이 많은 작은 고모부님의 취흥과 해가 설핏 기우면 앞산도 순식간에 저물었다. 헛간 앞에 쑥을 태운 모깃불이 연기를 피워 올리고 간헐적으로 두견새가 먼 곳에서 울음을 보내온다.

“뭐니 뭐니 해도 여름엔 모싯떡이제.”

으레 마당에 둘러앉아 한 소리씩 보탰다. 나는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나의 공덕인 양 부끄러움 많던 어깨가 으쓱 올라가곤 했다. 어린 내가 느낀 평화는 여기까지였다.

“뭔 놈의 가시나가 그리 허겁지겁 처먹을꼬. 꼭꼭 씹어 먹어야 핏기가 놀라지 않제.”

암팡지게 먹고 있던 나를 향한 할머니의 한 마디에 눈물이 핑 돌았다. 슬쩍 걱정된 엄마는 그런 말에 하등 상관하지 말라는 눈짓을 보내온다. 목구녕에 가시로 남은 떡을 게워내고 나는 먹던 떡을 던져버렸다. 어린 나이였지만 귓구녕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던, 전쟁통에 잃어버린 두 아들의 이야기가 또 나올까 싶어 자리를 떴다. 
오근자근 나누던 이야기도 사라지고 몇몇은 코까지 골며 잠에 빠졌다. 아직 제사를 지내려면 자정은 멀었다. 나는 조금 전 할머니의 그 말이 내내 걸려 섭섭함이 가라앉지 않았다. 뒤축 닳은 신발을 꺾어 신고 우물둑이 있는 삼거리까지도 나가보고 순옥이네 감나무 아래까지 거닐다 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쥐똥나무에 던져버린 모시떡에 침을 뱉었다. 참말로 모진 가시내가 되어갔다. 죽기보다 제사가 싫다며 울다 사랑방 구석에 쪼그려 한잠 자고 일어나면 자정이 지났다. 아침이면 할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다시는 모시 이파리를 따러 가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일은 열여덟이 되도록 했다. 골짜기 어린 낙엽송이 어느새 훌쩍 자랐다. 중중하게 산비탈에서 평온한 아침 휴면을 취하는 풍경까지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농사보다 바빠 보였던 마을의 제사들은 세상을 뜬 친인척들이 많을수록 줄어들었다. 얼기설기 엮인 싸리문도 없는 집집마다 본맥을 벗어난 작고 허망한 이야기들이 삐져나온다. 되나마나 한 이야기들이 목소리를 높여 튀어 나오기도 한다. 그 골짜기의 제사 풍습이 아리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들은 이야기지만 모시 농사를 짓는 사람 중에는 허리 아픈 사람과 무릎 아픈 사람이 없었다고 할 만큼 칼슘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 많은 모시떡을 즐겨 먹던 당신은 녹아내린 뼈에 엉금엉금 기다시피 한 몸으로 여전히 말씀하신다. ‘제사 잘 모시면 아픈 사람 없다.’고 말이다. 적어도 내 눈에는 된서리를 혹독하게 맞아 보였다고 할까.
그 어린 날의 모시떡 기억 탓일까. 죽기보다 싫었던 제사 탓일까. 시댁에서 모신 제사떡은 죄다 냉동실에서 급사 되었다가 다시 쓰레기통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음식에 대한 미안함도 없는 걸 보면 정말 내 몸엔 사악한 피가 흐르는 게 아닐까. 언제쯤이면 마지못해 지내는 의무의 제사가 아니라 경외스러운 제사에 경전 같은 떡을 빚어 올리고 모시게 될까. 지금 자그마한 생각이지만 당신은 거미줄에 하루살이나 실잠자리만 걸리는 게 아니라 첫 새벽엔 이슬도 걸린다는 것을 내게 무언으로 남겨준 게 아니었을까. 그리곤 당신에겐 은근 그 옛날의 가난한 집안에서 챙겨야 할 제사가 가장 따뜻한 나날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없는 살림에 그날만이라도 가족들 배불리 먹일 수 있으니.
오늘은 슬쩍 포탄 같은 떡 뭉치를 꺼내 찜통에 찐다. 김이 술술 난다. 연거푸 폭염 문자가 배달된다. 안방 온도계는 영상 38도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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