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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경의 수필산책

[정아경의 수필산책] 육식의 유연성에 관한 질문

[309호] 입력ㆍ발행 : 2016-10-25

예쁜 강아지를 자식처럼 키우는 친구가 있다. 강아지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자식을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물을 학대하는 프로그램을 보며 친구는 그들의 잔인함에 치를 떨며 그들을 혐오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친구가 좋아하는 음식이 치킨이라는 것이다. 바싹하게 튀겨진 닭다리와 맥주는 환상의 궁합이라며 즐긴다.
 부화하자마자 수컷은 분쇄기로 보내버린다는 병아리 감별사 얘기를 들을 때면, 다시는 치킨을 먹지 말아야지 다짐하고는 한다. 시도때도 없이 고기를 섭취하면서도 잔혹하게 사육당하는 동물을 보면 눈물을 흘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육식은 육식대로 즐기면서 속으로는 포식자들을 혐오하는 모순 속에서 나는 그것에 대해 죄책감은 느껴본 적이 없다. 우리는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선 승리자이기에 육식은 포상과도 같은 것이라고. 일말의 흔들림 없이 그렇게 살아왔다. 적어도, 채식주의자를 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여자는 어느 날 꿈을 꾼다. 그녀는 시뻘건 고깃덩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숲을 보았다고, 핏빛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녀는 굴무침을 좋아했다. 원 없이 먹어봤으면 좋겠어 엄마, 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닭도리탕을 맛깔나게 만들었고, 그녀만의 독특한 삼겹살 조리 비법까지 가지고 있었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그녀였다. 그랬던 그녀가 냉장고에 있는 모든 고기를 끄집어낸다. 심지어 달걀과 우유까지도. 모든 숨이 붙어있는 것들, 붙어있었던 것들, 곧 붙어지게 될 것들을 냉장고에서 해방시킨다. 그의 작은 냉장고에서 탈출해봤자, 그들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그녀는 스스로를 위해 고기를 혐오한다. 윤리적인 이유도, 건강상의 문제도 아니다. 소설 속 그녀의 남편도, 독자인 나도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편은 미처 알지 못했던 그녀의 육식에 대한 역사를, 나는 소설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소녀였을 적, 그녀의 집을 지키던 개는 그녀를 물었다는 죄로 인해 목숨을 잃는 큰 형벌을 받게 된다. 아버지의 오트바이에 묶여 죽을 만큼 뛰다가, 죽을 만큼 끌려다니다가, 결국엔 죽고 만다.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는 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통쾌함을 느낀다. 제까짓게 나를 물어? 곧 그녀의 눈에 시뻘겋게 변해버린 개의 눈알이 비친다. 그날 저녁 그녀는 아빠가 입에 넣어준 부드러운 살코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 때 먹은 개고기 한 점으로 인해 그녀의 비극이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브래지어를 차서 답답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여기가 답답해. 아마 그때 먹은 그 한 점이 씻어내릴 수 없는 체증으로 그녀의 가슴 속에 남아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녀의 육식혐오는 어린 시절의 죄책감이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 아닐까. 육식을 거부하던 그녀는 더 이상 음식 따위 필요하지 않는다며 먹는 행위 자체를 부정한다. 그렇게 점점 말라비틀어진 고목나무가 되어간다. 모든 가족들이 그녀의 이상행위에 치를 떨며 그녀를 떠날 때도 그녀를 포기하지 않던 언니는 마지막에 죽어가는 동생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인다.

 "이건 말이야, 어쩌면 꿈인지 몰라."

 책은 영혜의 마지막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토록 원하던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죽음을, 그녀의 채식을 어떻게 정의내려야할지 고민했다. 어릴 적 생명을 경시했다는 이유로 그녀가 벌을 받는 것일까. 그녀의 죄책감은 분명히 그녀의 채식주의에 동조했다.
채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그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서 그녀는 그녀 스스로 자연으로 복귀하는 것을 갈망하고 있다. 벌을 받는 자의 최후라기에는 당사자가 본인의 상황을 진정으로 원하는 듯 했다. 나는 그녀의 채식을 정의내릴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죽음 또한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녀, 영혜는 채식주의자이기 보다는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한그루의 인간이었다. 더 이상의 음식도, 사랑도 아닌 오로지 광합성만을 필요로 했다. 그녀는 살아야한다고 주사기를 들이미는 사람들을 향해 말한다. 왜 살아야 해? 왜 죽으면 안 돼?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배운, 우리는 이 구절에서 잠시 사고를 멈춘다. 아무도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나는 비로소 그녀를 이해할 필요도, 그녀의 채식을 정의내릴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일에 마땅한 근거를 요구하는 사회의 통념 속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영혜. 그녀의 걸음걸이는 위태롭지만, 번뜩이는 두 눈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있다. 그런 그녀를 굳이 정의 내려야 할까. 나는 책을 덮으며 이 소설은 ‘정의내릴 수 없는’ 소설이 아니라 ‘정의내릴 필요가 없는’ 소설이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자신의 프레임에 맞추어 평가하고, 절하한다. 그에 따라 우리는 누군가의 프레임 속에 갇혀 평가받고, 절하당하고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영혜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봐주자. 모든 것을 정답 또는 오답으로만 요구하는 삶 속에서 이렇게 되뇌어보자.

내가 왜 그래야 해? 왜 이렇게 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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