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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역사칼럼] 역사 바로 잡기(XlI), 임나(任那)는 한반도가 아니다

[256호] 입력ㆍ발행 : 2015-08-03



한일 고대사에서 가장 논란의 핵심은 바로 ‘임나’의 위치이다.
일본은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가 만삭의 상태로 삼한 정벌에 나섰다는 신공기 49년(249년) 기사를 들어, 한반도에 ‘일본부’를 설치하고 지배하였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해 왔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설은 임진왜란 당시 ‘정한론’으로 발전해 침략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일제는 조선 침략 당시에도 ‘신공황후’의 삼한정벌과 ‘광개토태왕비문’ 등을 근거로 임나가 한반도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고서인 <일본서기>에는 ‘임나’라는 지명이 200여 차례 등장한다. 1945년 광복 전 까지 임나의 위치와 이로 인한 한일간의 관계를 비정하는 책은 무려 100여 권이 넘으며, 광복 이후에도 일본의 역사학자와 한국의 친일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양산되어 오고 있다.
더욱이 일제시대에는 1939년 4월 당시 조선 총독 미나미(南次朗)가 ‘임나대가야국성지(任那大加耶國城址)’라는 비문을 새겨 고령읍 향교 옆에 비를 세우기도 했다.(사진) 대가야국의 도읍지가 고령읍이며, 고령이 임나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고령은 한일 고대사에서 논란의 중심이 되어 왔다.
특히 대표적인 친일 식민사학자인 이병도를 비롯해 그의 제자들과 진단학회 학자들에 의해 한반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정설처럼 여겨져 왔다. 더욱이 고령의 향토사학자들 조차 이들의 주장을 그대로 뺏겨 ‘任那(임나)는 高靈(고령)이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고령지역의 향토사조차 친일 식민사학자들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최동(崔棟, 일본식 이름 : 山佳棟, 1896~1973)의 <조선상고민족사> 내용인 “狗耶國(구야국)은 후일의 加羅(가라)로서 김해지방이요 任那(임나)는 지금의 高靈(고령)이다”라는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최동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분에 선정되었다. 특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대표적인 친일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저술한 <한국고대사연구>의 ‘임나가 고령이다’는 주장도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일본서기> 제5권 숭신천황(崇神天皇 : 스진텐노) 65년 가을 7월 “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筑紫國)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으며 계림(鷄林)의 서남쪽에 있다.”라고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축자국은 지금의 일본 규슈지역으로 이로부터 2,000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이 바다이며 신라의 수도인 계림으로부터 서남쪽에 위치한 곳은 ‘대마도’ 밖에 없다. 더욱이 고령 대가야와 김해 금관가야는 내륙에 위치하고 있기에 이곳이 임나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인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근거로 제주도가 임나가 아니냐는 주장도 하고 있으나, 당시 한반도 국가의 이름에는 ‘羅(라)’자를 붙여 표현했다. 가라(加羅), 다라(多羅), 아라(阿羅), 안라(安羅), 신라(新羅), 사라(絲羅), 탐라(耽羅) 등 한반도에서 존재했던 대부분의 나라 이름 끝에는 ‘라’자가 붙는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百濟)도 ‘쿠다라(큰 나라)’라고 읽고 있다. <일본서기>에서 제주도를 탐라라고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제주도는 당시 독자적인 국가로 임나가 될 수 없다.

한국 상고사를 정리한 책인 ‘환단고기’에는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계에 있었는데, 북에는 바다로 막혀 있다. (중략) 나중에 대마(對馬)의 두 섬(상도와 하도)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바 되어 그 때문에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일컫게 되었다.”(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제 6) 라고 기술하고 있다. 1911년 지어졌다는 환단고기를 두고 ‘위서’라며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환단고기를 지은 계연수는 전해져 내려온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記), 북부여기(北夫餘記), 태백일사(太白一史)를 하나로 묶어 편찬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환단고기에서 언급된 고서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가 몇 차례에 걸쳐 조선 전역에서 20여만 권의 서적을 수거해 폐기하는 과정에 소멸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편찬할 당시는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대문이 지었다는 ‘화랑세기’ 역시 국내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박창화가 일본황실도서관에서 10여 년간 근무하며 필사했다는 ‘화랑세기 필사본’도 당초 위서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내용이 현재에 와서 정확하게 일치해 신뢰해야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화랑들이 숙소에서 몰래 빠져나와 술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도랑에 빠졌다는 내용 등은 화랑세기 필사본이 알려지고 난 후 해당 유적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그 위치에 정확히 도랑이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위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임나’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임나’ 또는 ‘임나국’, ‘임나관가’라는 단어는 있어도 ‘임나가라’ 또는 ‘임나가야’라는 단어는 없다. <송서> 倭人傳(왜인전)에 나오는 왜 5왕 중 왜왕 濟(제)가 451년에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倭國王’이라 받은 작호에는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등 여섯 나라가 등장한다. 즉 ‘임나가라’가 아닌 ‘임나’와 ‘가라’를 각각 독립된 나라로 봐야 할 것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의 신묘년 기사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를 두고 일본은 “백잔(백제)과 신라가 예전부터 속민으로 (고구려에) 조공을 해왔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 □□신라를 깨트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며,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한 기사(249년)와 일치한다며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는 해석의 오류로, “…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내습하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 □□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오니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 백잔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 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특히, 이 기사의 바로 뒤에는 5년 후인 영락 6년(396년)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즉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했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앞선 왜의 한반도 침공에 따른 광개토태왕의 출정 명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 신라 내물왕이 백제와 왜의 협공을 받아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광개토태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가서 신라를 구하였다는 기사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일본이 주장하는 신공황후 삼한 정벌 이후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식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일본이 광개토태왕비문을 왜곡·해석해서 주장하고 싶은 ‘임나일본부’는 무엇일까.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가 23번 등장하며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임나일본부’라는 단어 옆에 친절하게 ‘미미나 야마토노 미코토모치’라고 읽으라며 표시까지 해 놓았다. 여기서 ‘부’에 해당하는 ‘미코토모치’는 관청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임나일본부’는 ‘일본왕이 임나에 파견한 사신’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를 다스렸던 일본의 관청이라는 주장은 <일본서기>조차 제대로 인용하지 않는 억지 주장인 것이다.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 기사는 흠명천황 2년조(541년)부터 15년조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흠명천황 2년 4월에 성명왕이 ‘근강모야신’을 ‘임나일본부’라 부르고 있는 것이 처음이다. 특히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의 역할은 외교활동에 국한되어 있다. 임나지역을 통치하는 관리였다면 세금징수와 군사징발 등 지배국 관리로서의 역할이 있어야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일본서기>에서는 단 한 번도 찾아 볼 수 없다. 때문에 ‘임나에 일본국에서 파견한 사람이 있었다’는 정도로 해석하는 게 ‘임나일본부’의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안라일본부’도 <일본서기>에는 많이 기술되어 있다. 백제가 안라의 일본부의 하내직이 신라와 통모하고 있는 것을 심하게 꾸짖는 기사, 안라에 가서 임나의 일본부를 만나 서로 맹세하게 하는 기사 등이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임나와 안라의 일본부는 일본의 명령도 백제의 명령도 잘 듣지 않는 특히 신라에 친화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어 일본왕이 백제와 안라, 가야 등으로 하여금 임나를 바로 세우라며 협조를 당부하는 내용도 다수 존재하고 있다.

<일본서기> 계체천황 9년(516) 조에는 왜국 사신 물부련과 수군 500명이 대사강에 머무른 지 6일 만에 반파가 군대를 일으켜 와서 그들을 공격하여 쫓아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반파, 즉 고령의 대가야가 군대를 일으켜 대사강, 즉 하동 부근의 섬진강 유역까지 와서 왜국 사신 일행을 공격한 사건을 말한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임나가 고령이었으며, 일본이 통치하는 지역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안라, 일본부, 임나의 명칭이 동시에 등장하는 기사가 있다. 흠명천황 13년 5월, 무진삭 을해(8일)에 백제, 가야, 안라가 중부 덕솔 목리금돈과 하내부 아사비다 등을 보내어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천황이)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왕, 가라왕과 일본부의 신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상주한 상황은 잘 들었다. 또한 임나와 함께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하여라.”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기사를 보더라도 고구려와 신라가 힘을 합쳐 백제와 임나를 공격하려하니 원병을 보내달라는 백제의 요청에 일본왕은 백제, 안라, 가라, 일본부, 임나가 힘을 하나로 해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때문에 안라 또는 가야일대를 임나로 총칭하는 것은 <일본서기>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5년(554년) 조에는 흠명천황이 임나의 집사와 일본부의 집사를 소집하였으나 이에 불응하는 내용이 나온다. 임나와 일본부가 신분이 낮은 자를 보내 협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이에 백제가 임나에 사신을 파견하며, 백제는 임나가 멸망한 원인이 하내직에게 있다고 책망하고 있다. 특히 일본부경과 임나의 한기들에게 임나부흥협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에 대해 꾸짖고 있다. 또한 백제가 임나에 사신을 파견하여 친신라파들에 대해 소환을 요청하기도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는 당시 흠명천황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이에 백제는 사신을 보내 일본부의 신과 임나의 집사를 불러 “지금 일본부의 신과 임나국의 집사는 마땅히 와서 칙명을 듣고 함께 임나의 일을 협의하라”고 말한다. 이에 일본의 길비신, 안라의 하한기 대불손, 구취유리,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군 사이기군, 산반해군의 아들, 다라의 이수위 흘건지, 자타한기, 구차한기가 백제에 이르렀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임나와 일본부는 한반도 가라, 안라 등 가야지역이 아닌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한반도 외의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앞에서 밝혔듯이 임나를 대마도와 큐슈일원으로 비정한다. 이렇게 비정하면 <일본서기>의 대부분의 기사들이 해석이 가능하다. 특히 임나 10국 또한 한반도의 지명에서 추측해 비정하지 말고 대마도나 큐슈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이 1963년 처음 주장한 ‘삼한 삼국의 일본 열도 분국설(日本列島分國說)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김석형은 <초기 조일관계 연구>를 통하여 삼한 및 삼국시대 사람들이 북규슈를 중심으로 일본 열도 전역에 분국(分國)을 설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 내용은 삼한과 삼국의 거주민들이 일본 열도에 도래하였고, 그들은 본국(本國)에 대등하는 분국을 세워 본국과의 교류를 하였다는 것이다. 칠지도는 본국 백제왕이 분국 백제왕에게 활발한 교유의 결과로 하사한 것으로, 4세기 무렵 일본 열도에 통일 왕조가 건설되었고, 통일 왕조가 그 중 분국 임나를 점령하면서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본열도에 또 다른 삼한이 있었다는 생뚱맞은 주장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일본서기>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면 이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흠명천황 2년(541년)에 백제의 성명왕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일본 천황이 조를 내린 바는 오르지 임나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이제 어떤 책략으로 임나를 재건할 수 있겠는가. 모두 각자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뜻이 펼쳐지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임나 한기들은 “이전에 두세 차례 신라와 의논하였으나 회답이 없었습니다. 의도하는 바를 다시 신라에 알린다고 해도 여전히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562년 대가야 멸망과 함께 임나가 멸망했다는 주장과 달리 이전에 임나가 신라에 복속되어 이를 재건하려는 왜왕의 노력이 돋보이고 있다. 민달천황 4년(575년) 4월 길사금자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길사목력자를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고, 길사역어언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사에서 보듯이 562년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세력 멸망 후에도 일본은 임나에 사신을 보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임나가 백제, 신라와 함께 조공하였다는 기사가 다수 나오고 있다. 일본의 임나에 대한 사신 파견은 이후에도 숭준천황 4년(591년)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추고천황 8년(600년)에는 신라와 임나가 서로 싸우기까지 하고 있다. 추고천황 31년(623년)에는 신라가 임나 토벌에 나서기도 하고, 서명천황 10년(638년)에는 백제, 신라, 임나가 함께 일본에 조공한 기록도 나오며, 효덕천황 2년(646년)에는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가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부를 받쳤다는 기사도 나온다.

이처럼 <일본서기>에서 ‘임나’는 가야제국 멸망 후에도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고구려·백제·신라와 함께 7세기 중엽까지 존재했다고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일본서기>에서 발단이 된 ‘임나’를 <일본서기>로 살펴보더라도 ‘임나’는 가야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일원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때문에 <일본서기>에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일본 큐슈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으며, 경주의 서남쪽에 위치한 ‘대마도’가 ‘임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로 광복 70년을 맞았다. 1910년 8월 국권피탈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35년간 우리는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식민통치를 당했다.
이 기간 동안 동족을 탄압하며 호위 호식했던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처벌은 단 한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친일세력이 광복 후 정권을 잡고 기득권을 유지하며 독립운동세력을 탄압하는 일이 이 땅에서 자행되었다. 견고한 친일세력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이루지 못한 친일파 청산은 민족의 영혼마저 바꾸어 버렸다. 또 다시 70년 전과 같은 세상이 온다면 어느 누가 앞장서 이 나라의 자존을 위해 싸우겠는가. 혼란스럽고 통탄할 노릇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과거사조차 청산하지 못하는 우리민족에게 미래가 있는지 의문이다.

일본은 지난달 16일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자위대법 개정안 등 ‘평화안전법제 정비법안’과 자위대의 해외 파견을 수시로 가능하게 하는 ‘국제평화지원법안’ 등 안보관련법 제·개정안 11개를 중의원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켜 참의원으로 보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과 무력행사를 금지해 온 일본이 사실상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일본의 잘못된 역사교육이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역사관이 오늘날의 왜곡된 역사교과서로 연결되어 현재 일본의 중·고등학교에서 ‘임나’를 한반도 가야지역으로 가르치고 있다. 침략과 지배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지난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푸는 열쇠라 했다. 이 같은 일본의 우경화를 남의 나라 일이라 지켜만 볼일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먼저 과거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본의 식민사관에 기초한 왜곡된 역사를 우리가 먼저 배척하고 우리의 역사를 우리 스스로 정립해 나아가야 한다.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남긴 망언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글 박장호
주)대가야신문 대표
사)대가야향토사연구회 회장

사단법인 대가야향토사연구회는 1956년 5월 조직되어 올해 59년을 맞은 고령의 유일한 역사문화연구단체이다.
초대 회장을 맡은 김도윤 씨를 이어 허동량(2대, 1998), 이달초(3대, 2003), 김인탁(4대, 2005) 씨가 회장을 역임했으며, 지난 6월 26일 박장호 대가야신문사 대표가 5대 회장에 취임했다.
대가야향토사연구회는 대가야 역사·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기고나 연구저서·논문을 발표하는 등 지역의 정체성 확립과 애향심 고취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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