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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대가야의 재조명(Ⅱ), 아픈 역사도 역사의 현장에서 후세에 알려 기념해야

[178호] 입력ㆍ발행 : 2013-10-31
임나대가야국성지 및 츠끼노이키나순절비 반환과 복원통해 역사의식 고취해야


▲ 필자의 취재과정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일제 강점기 사진이다. 임나(任那)의 글씨가 존재하는 것과 군복을 입을 것으로 미루어 해방이전의 사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에는 ‘任那大加耶國城址’라는 비문과 ‘調伊企難殉節址’라는 비문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 왼쪽 ‘任那大加耶國城址’비는 1986년 독립기념관으로 이관되고, 1990년 새로 만든 ‘大加耶國城址’라 새겨진 비석이 대신하고 있다. 오른쪽 ‘調伊企難殉節址’비는 고령중학교 교훈비로 이용되고 있으며 현재의 자리에는 ‘任那大加耶國城址’비가 독립기념관으로 이관된 내용이 새겨져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서기 42년 뇌질주일(惱窒朱日)이 대가야국을 세워 그 왕조와 문화가 16대 520년간 번영했던 유서 깊은 성터이다. 일제는 1939년 4월, 당시의 조선 총독 님차량(南次郞)으로 하여금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 고대 일본이 대가야국을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뒤받침 함과 아울러 한국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임나 대가야국성비지를 세우게 하였으나, 광복 후에 비문속의 임나(任那)와 남차랑(南次郞)등 문자만 삭제하고 존속해오다가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의 요청으로 성지비를 역사 전시자료로 삼기 위하여 1986년 12월 5일 독립기념관으로 옮겼다. 이제 우리 조상의 슬기를 찾고 올바른 민족정신과 국가관을 정립하여 찬란했던 대가야 문화를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군민의 뜻을 모아 다시 이 자리에 대가야국성지비(大加耶國城址碑)를 세웠다. 1990년 12월 고령군수“


고령읍 명산인 주산 아래 연조리 일대는 대가야국의 궁성지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29권 고령현 ‘고적’조에는 “현의 남쪽 1리에 대가야국의 궁궐터가 남아 있다”고 기록돼 있어, 이 근처에 실제 궁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특히, 현재 향교가 위치한 주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높고 평탄한 지대는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아주 적합한 지형이라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곳에 ‘大加耶國城址(대가야국성지)’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90년 12월 세워진 이 비석은 고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36년 제7대 총독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황국신민화와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 내선일체, 창씨개명 등 중일전쟁 이후의 식민지 강화에 열을 올렸다.
1939년 4월 29일,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는 당시 고령향교 옆 학교부지 앞에 ‘任那大加耶國城址(임나대가야국성지)’ ‘南次郞 書’라 쓴 친필 비(전면 8.8m, 측면 6.4m 규모의 화강석 난간을 구획하고 그 안에 사방 3.5m, 높이 1.3m의 석축 기단 조성)와, 그 옆에는 ‘調伊企難殉節址(츠끼노이키나순절지)’라 쓴 친필 비(높이 140cm, 최대 폭 70cm, 두께 20cm 정도의 얇고 길쭉한 판석상의 타원형 자연석)를 세웠다.

이 두 비석은 ‘임나일본부’란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세운 것으로,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일본이 가야가 위치한 한반도 남부를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했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3세기경에는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일본의 고대사회가 발전했다는 논리를 펴며,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任那大加耶國城址비’는 이를 주장하기 위해 조선 총독이 직접 친필로 비를 세운 것이다.
‘調伊企難殉節址비’는 임나 구원군으로 출병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순절한 츠끼노끼시 이키나의 일화를 비로 세운 것으로 일제는 이를 순절비라 불렀다. 『일본서기』권19, 흠명기 23년 7월조에 나오는 키노 오노마로의 임나구원 기사에 따르면, “임나가 신라에 멸망하자 키노 오노마로가 출병하였다. 이 때 신라와의 전투에서 부장군 카하헤노오미 니혜와 함께 포로가 된 츠끼노(끼시) 이키나는 사람됨이 용맹하여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고, 그의 아내 오오바꼬와 아들도 사로잡혔다. 그때 신라는 쯔키노끼시 이키나의 엉덩이를 내어 보이게 하고 그것을 일본으로 향해 모욕적인 말을 하게 했다. 그러나 츠끼노끼시 이키나는 단호히 ‘신라의 왕이여, 내 엉덩이를 핥아라’라고 외치고 살해당했다. 그 아들도 아비의 시신을 안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는 이곳에 총독이 비를 세움으로써 임나일본부의 근거지가 고령의 대가야이며, 그 핵심인 궁성지에 상징적인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그러한 사실을 공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가 임나일본부를 고령으로 인식하고 지산동고분 발굴을 통해 그 증거를 찾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하자, 마지막 수단으로 총독의 친필 비를 건립함으로써 정치적 선언으로 임나일본부를 규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전의 수많은 조사에도 불구하고 임나일본부의 학술적 증거를 얻지 못한데 대한 부담을 비롯해, 1930년대에 들어 복잡하게 확대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임나문제에 대해서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의지로 보인다.
또한 츠끼노끼시 이키나의 일화를 비로 세운 것은, 일제가 천황에 대한 충성 맹세를 강요하던 당시의 전쟁 상황에서 필요로 했던 상징조작의 하나로 보인다. 더욱이 보통학교 교정에 이와 같은 정치적 상징물을 세우고 교육한 것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 하고자 했던 고도의 계략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 두 비석은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의 중심에 있으며, 한국고대사의 복원뿐만 아니라 한일관계사 및 동아시아 역사의 재구축과 올바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사적임에 틀림없다.
특히, 이 두 비석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증거물로 역사적 현장에 영원히 보존하여 후세에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좌)독립기념관에 이관된 ‘任那大加耶國城址’비석이다. 임나(任那)의 글씨가 쪼아 내져 있다. 비석의 위치가 건물과 환풍장치와 인접해 있어, 독립기념관에서 소중한 유물을 가져가 방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고령주민들도 있다.
▲ (우)고령중학교 교훈비로 이용되고 있는 ‘調伊企難殉節址’비석이다. 현재 앞면에는 세겨진 글자를 모두 지우고 고령중학교 교훈을 세겨 놓았다. 뒤면은 세겨진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모두 쪼아 냈다. 그러나 이 두 비석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험난한 여정을 만난다.
‘任那大加耶國城址비’는 해방 후 고령군민이 ‘任那’ 및 ‘南次郞 書’와 뒷면의 ‘昭和十四年’ 글자를 쪼아냈다. 이후 1986년 12월 5일 비석만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해가고 난간과 석축은 현재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다. 1990년 12월 새로 만든 ‘大加耶國城址’ 비를 석축위에 올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調伊企難殉節址비’는 해방 후 고령초등학교 어정 부근으로 옮겨져 돌다리로 사용되다가 그 후 앞뒤면의 글자를 모두 쪼아내고 고령중학교 교훈비로 이용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이 두 비석을 관계기관과 협의를 거쳐 원래의 위치로 반환,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진 ‘任那大加耶國城址비’는 1986년 당시 독립기념관의 개장을 앞두고 유물이 부족하자, 정부에서 나서 전국의 시군에 있는 일제식민과 관련된 유물·유적을 일제히 조사했으며, 당시 관선 군수를 통해 일괄 이전함으로써 고령군민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필자가 확인한 결과, 당시 고령군청 담당자는 “역사 인식이 현재에 비해 많이 부족한 시절로 정부의 요청에 의해 이관되었으며, 소유권 이전을 포함하는 ‘기증’의 형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회상했다. 독립기념관 측은 “당시 어떠한 형태로 독립기념관으로 이관하게 되었는지 관련 서류를 찾아 밝히겠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독립기념관으로 이관된 ‘任那大加耶國城址비’의 반환은 쉽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독립기념관 관계자에 따르면, 고령처럼 당시 이관된 유적·유물의 반환 요구가 최근 이어지고 있지만 단 한건도 반환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어, 이관 당시 행정적 처리 과정을 확인해 그 부당함을 독립기념관측에 알려 반환을 협의(요구) 해야겠다.
이에 앞서 고령중학교의 교훈비로 이용되고 있는 ‘調伊企難殉節址비’도 학교 측과 협의하여 우선 이관함으로써 ‘任那大加耶國城址비’의 반환에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고령이 대가야의 수도이며 일제가 임나일본부의 중심으로 인식한 역사적 의미를 널리 후세에 알리고, 일제강점기의 역사왜곡을 현장에서 증명하는 기념물로 정비하여 역사교육과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글 박장호
주)대가야신문 대표
사)대가야향토사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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