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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대가야의 재조명(Ⅰ), 우륵은 신라로 망명하지 않았다

[176호] 입력ㆍ발행 : 2013-10-17

우리 고장 고령은 대가야국의 도읍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가야국이 역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김부식의 저서 『삼국사기』가 처음이다.
그러나 동시대를 공유했던 백제, 고구려, 신라에 비해 대가야의 역사 기록은 빈곤하기 짝이 없다. 때문에 다른 나라와의 국제정세를 통해 미뤄 짐작하거나, 발굴된 유물로 추정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로 인해 대가야의 역사가 왜곡되거나 폄하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령의 임나일본부설, 우륵의 망명, 월광태자의 망명, 대가야국의 멸망 과정에서의 분열 등이다.
최근 공연된 실경뮤지컬 ‘대가야의 혼’에서도 우륵과 관련해 대가야의 역사를 폄하하는 내용이 담겨 우리 주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때문에 고서에 담긴 대가야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 등 관련 자료를 수집해 새롭게 대가야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 위 지도의 경계는 삼국사기 등에 기술된 아래의 역사적 사실을 참고해 제작되었다.
▶ 550년 1월,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 함락.[도살성(道薩城)은 현재의 충북 괴산군 도안면이라는 견해와 충남 천안이라는 견해가 있다.] ▶ 550년 3월, 고구려군이 백제 금현성 함락.[금현성(金峴城)은 현재의 충북 鎭川郡 鎭川邑에 비정된다. 그러나 이를 충남 全義 지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550년, 신라가 도살성과 금현성 함락. ▶ 551년 3월, 우륵과 진흥왕이 난성에서 처음 만남.[낭성(娘城)은 현재의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림궁(河臨宮) 현재의 충청북도 충주시 남한강 가에 있었던 별궁(別宮)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 551년, 백제(성왕 29년) 고구려 6군 점령, 신라(진흥왕 12년) 고구려 10군 점령.[위 그림의 국경은 대가야·백제·신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직전의 경계이다.]



우륵은 신라로 망명하지 않았다

우륵이 언제 태어났으며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현존하는 역사서에 없다.
우륵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이며, 김부식이 신라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해 집필한 『삼국사기』 제3권 잡지 제1 ‘악(樂)’에서 『나고기(羅古記)』에 “가야국 가실왕(嘉實王)이 당나라 악기를 보고 만든 것인데, 가실왕이 스스로 이에 대하여 ‘모든 나라의 방언은 각각 그 성음(聲音)이 다른 것인데 어찌 당나라의 노래만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악사인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于勒)에게 명령하여 12곡을 작곡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우륵이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眞興王)에게 귀순하였다. 왕이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에 정착시키고 곧 대나마(大奈麻) 주지(注知)와 계고(階古), 대사(大舍) 만덕(萬德) 등을 보내 그에게서 수업하게 하였다. 세 사람이 11곡을 배우고 나서 서로 말하였다. '이 음악이 번잡하고 음탕하여 우아한 음악이 될 수 없다.",
"마침내 그것을 줄여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 이 말을 듣고 성을 내었으나 그 다섯 가지 음률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여 말하였다.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너희들이 왕 앞에서 이를 연주하여라!' 진흥왕이 그 곡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신하들이 건의하기를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을 취할 것이 없다고 하니 왕이 말하였다. '가야왕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자멸한 것이지 음악에 무슨 죄가 있으랴?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 이를 조절하도록 한 것이므로 나라의 태평과 혼란이 음률 곡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 이를 연주하도록 하고 대악(大樂)으로 삼았다. 가야금에는 두 음조(音調)가 있는데 첫째는 하림조(河臨調)요, 둘째는 눈죽조(嫩竹調)이니 모두 185곡이었다."

羅古記云 加耶國嘉實王 見唐之樂器 而造之 王以謂諸國方言各異聲音 豈可一哉 乃命樂師省熱縣人于勒 造十二曲 後 于勒以其國將亂 携樂器 投新羅眞興王 王受之 安置國原 乃遣大奈麻注知階古大舍萬德 傳其業 三人旣傳十一曲 相謂曰 此繁且淫 不可以爲雅正 遂約爲五曲 于勒始聞焉而怒 及聽其五種之音 流淚歎曰 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 爾其奏之王前 王聞之大悅 諫臣獻議 加耶亡國之音 不足取也 王曰 加耶王 淫亂自滅 樂何罪乎 蓋聖人制樂 緣人情以爲撙節 國之理亂 不由音調 遂行之 以爲大樂 加耶琴有二調 一河臨調 二嫩竹調 共一百八十五曲 라고 기술하고 있다.

우륵과 신라 진흥왕이 처음 만난 것은 551년 3월 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권 진흥왕 12년 춘삼월(551년 3월) ‘우륵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다’에서 3월에 왕이 순행(巡幸)을 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서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충북 충주시 남한강 가에 있었던 별궁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음]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加耶國)의 가실왕(嘉悉王)이 12줄 현금(弦琴)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12달의 음률을 본뜬 것이다. 이에 우륵에게 명하여 곡을 만들게 하였는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의하였다. 그 악기의 이름은 가야금(加耶琴)이다.

三月王巡守 次娘城 聞 千勒 及其弟子 尼文 知音樂特喚之王駐河臨宮令奏其樂二人各製新歌奏之先是 加耶 國 嘉悉 王製十二弦琴以象十二月之律乃命 于勒 製其曲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 라고 기술하고 있어,

대가야국의 관할인 성열현(省熱縣)[우륵의 출생지와 관련한 논쟁은 차후 기고] 출신 우륵이 “나라가 어지러워지자(國亂) 우리에게 몸을 맡겼다(投我[투아])”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륵이 신라로 망명했다는 명제가 생겨났다.

이 『삼국사기』의 구절이 많은 문헌에서 인용되어 대가야의 악사 우륵이 신라로 망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우륵 망명설’은 신라고기(新羅古記)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이는 즉 승자인 신라에 의해 작성한 역사를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삼국사기』 제32권 잡지 제1 ‘악(樂)’에 따르면, “신라의 음악은 세 가지 관악기, 세 가지 현악기, 박판과 대고, 가무가 있다. 그 중 세 가지 현악기는 현금, 가야금, 비파이다.” 新羅樂三竹三絃拍板大皷 歌舞 三絃一玄琴二加耶琴三琵琶 라고 기술하고 있어 가야금의 신라 유입에 대한 신라인들의 정당한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며, 이에 우륵이 대가야의 패망에 앞서 가야금을 들고 신라로 망명했다는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김부식이 인용했다는 신라고기(新羅古記)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어 『삼국사기』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 특히, 김부식의 왜곡된 역사관을 지적할 수 있다. 김부식은 신라지역 출신으로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는 백제를 비롯한 다른 나라 역사는 폄하하는 신라 중심적 역사관으로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백제가 당나라에 멸망하자 “대국의 죄를 얻었으니 그 망하는 것도 당연하다”라는 등 중립적이지 못한 역사관으로 기술하고 있다. 때문에 김부식이 신라의 입장에서 562년 대가야를 패망시킨 명분을 만들기 위해 대가야의 왕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자멸한 것”으로 폄하하고, 우륵이 대가야의 패망에 앞서 신라로 망명한 것으로 만들어 우륵의 음악을 계승한 신라에게 명분을 주고 있다고 보인다.

『삼국사기』제28권 백제본기 마지막에 김부식이 논평을 통해, “백제 말기에 와서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많았으며, 또한 대대로 신라와는 원수가 되고 고구려와 화친을 계속하면서 신라를 침범하여, 유리한 기회만 있으면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을 빼앗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른바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고 이웃나라와 잘 사귀는 것이 나라의 보배’라는 말과는 달랐다. 이에 당나라의 황제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도록 했으나, 겉으로는 순종하는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어겨 대국에 죄를 졌으니, 그들이 패망한 것도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論曰 新羅古事云 天降金樻 故姓金氏 其言可怪而不可信 臣修史 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然而又聞 新羅人 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見新羅國子博士薛因宣撰金庾信碑 及朴居勿撰姚克一書三郞寺碑文] 高句麗亦以高辛氏之後 姓高氏[見晋書載記] 古史曰 百濟與高句麗 同出扶餘 又云 秦漢亂離之時 中國人多竄海東 則三國祖先 豈其古聖人之苗裔耶 何其享國之長也 至於百濟之季 所行多非道 又世仇新羅 與高句麗連和 以侵軼之 因利乘便 割取新羅重城巨鎭 不已 非所謂親仁善鄰 國之寶也 於是 唐天子再下詔 平其怨 陽從而陰違之 以獲罪於大國 其亡也亦宜矣 라고 기술하고 있어 김부식의 편향된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김부식은 열전에서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다 하여 미워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소문이 머리를 조아리고 뭇 사람들에게 사죄하며 그 직을 임시로 맡을 것을 청하면서, 만약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쫓겨나도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마침내 허락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열전 궁예편에서는 고려4대 개국공신이 태조에게 아뢰는 과정에서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신료들의 목을 베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크나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일을 행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역사는 사실이 기록되어 전해지는 과정에서 재해석된다. 삼국사기 또한 김부식의 사견이 반영되었기에, 대가야의 패망도 이러한 정당성을 의도적으로 부여하기 위해 대가야의 왕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자멸한 것”으로 폄하하고 있다고 보인다. 때문에 역사속에 감춰진 저술자의 사견을 걷어 내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우리는 우리의 사관으로 역사를 재해석해야 한다.
이와 함께, 우륵이 신라로 망명했다는 기사의 단어 사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는 投我(투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즉, “우리에게 몸을 맡겼다”라는 말로 我(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삼국사기』에는 망명과 관련한 기사가 다수 존재한다. 이들 대부분의 기사에서는 来投(내투)라는 단어를 사용해 “투항해 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2년 1월(19년 1월) 백제인이 고구려에 투항해 온 기사에서 ‘来投’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5년 7월(22년 7월)에는 부여왕의 사촌동생이 고구려로 투항해온 기사에서 ‘来投’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또, 신라본기 제3 내물이사금 18년(373년)에는 백제의 독산성주가 신라로 투항하는 기사에서도 ‘来投’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밖에도 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 67년(478년) 백제의 연신(燕信)이 고구려로 투항한 기사에서도 ‘來投’이란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년 2월(669년 2월)에도 고구려왕의 서자 안승(安勝)이 신라로 투항한 기사에서도 ‘来投’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投我’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우륵의 기사가 유일하다.
그만큼 우륵이 신라로 몸을 맡긴 사건은 일반적인 망명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우륵이 자유로운 몸인 상태에서 우륵의 선택에 의해 신라로 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가야국이 멸망한 562년 이후 우륵이 망명인의 신분이 아닌 패망국의 자유인으로서 백제나 고구려가 아닌 신라로 온 사건을 신라 스스로가 ‘我(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해 의미를 부여했다고도 보여진다.
551년 우륵과 진흥왕이 만난 낭성(娘城)[충북 청원군 낭성면으로 추정]은 당시 대가야를 비롯한 백제와 신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특히 455년 맺어진 제2차 나제동맹으로 고구려의 남하를 공동으로 막고 있는 백제와 신라는 493년 혼인동맹까지 맺으며 관계를 돈독히 했으며, 551년에 이르러 대가야를 비롯한 백제와 신라 삼국이 연합군을 형성해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했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郡)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였다.
이후 신라가 553년(진흥왕 14년) 군사를 돌이켜 백제의 수복지인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고 거기에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양국의 실질적인 동맹관계가 깨져 554년 관산성전투로 이어진 악화일로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고 백제편에서 함께 싸운 대가야가 많은 피해를 봤던 곳으로[관산성 전투와 관련한 대가야의 패전은 차후 기고], 551년의 낭성은 삼국(대가야, 백제, 신라)이 함께 연합군을 형성하며 고구려 출격을 준비하던 삼국의 국경지대이다. 551년 고구려와 삼국연합군간의 전투에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직접 전투에 참여했듯이 대가야의 왕도 당연히 참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가야의 악사인 우륵 역시 대가야 왕과 함께 동행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551년에 세워진 진흥왕의 단양 ‘신라적성비’에 噵設指(도설지)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 또한 이 전투에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이 전투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551년 당시 상황을 비추어 본다면 대가야, 백제, 신라 삼국이 고구려에 대해 함께 연합군을 형성하던 시기이므로 동맹국간의 음악의 공유는 당연하다 하겠다. 또한 우륵이 신라로 망명했다면 국경지역이 아닌 보다 안전한 곳에 거주했어야 함에도, 대가야를 배신하고 망명인의 신분으로 대가야 군사들을 직면할 수 있는 낭성에 거주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삼국사기』 진흥왕편 552년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다’에서 “왕이 계고(階古)·법지(法知)·만덕(萬德) 세 명에게 명하여 우륵(于勒)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계고에게는 가야금(加耶琴)을 가르쳤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쳤으며,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학업이 끝나자 왕이 그들에게 연주하게 하고, 말하기를 ‘예전에 낭성(娘城)에서 들었던 음과 다름이 없다’라 하고 상을 후하게 주었다.”

十三年王命 階古 法 知 萬德 三人學樂於 于勒 于勒 量其人之所能敎 階古 以琴敎 法知 以歌敎 萬德 以舞業成王命奏之曰與前 娘城 之音無異厚賞焉 라고 기술되어 있다.

만약, 552년 당시(우륵과 진흥왕이 만난 1년 후) 우륵이 망명하여 신라에 구속되어 있었다면 진흥왕이 3명을 시켜 음악을 배우도록 하지 않고 경주로 불러 우륵에게 직접 음악을 연주케 하였을 것이며, 그 비유 역시 “예전에 낭성에서 들었던 음과 다름이 없다”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계고·법지·만덕이 진흥왕 앞에서 공연할 당시 당연히 동행을 했을 것이며, 상을 내려도 배우고 익힌 공보다 가르친 공이 더 크므로 우륵에게 상을 내렸음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때문에, 이는 진흥왕이 우륵을 경주로 데러 가지 못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며, 그 이유는 552년 당시 우륵이 신라로 귀의한 망명인의 신분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 후 우륵이 멸망한 국민의 신분으로 신라에 복속되어 살았을지언정 우륵 스스로가 대가야 패망 전 신라로 망명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정황상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제3권 잡지 제1 ‘악(樂)’에서 “왕이 그를 받아들여 국원(國原)에 정착켰다”라는 시기를 우륵과 신라 진흥왕이 만난 551년으로 본다면, 역사적 사건과 위배된다.
『삼국사기』 진흥왕편에는 “18년(서기 557), 국원(國原, 충북 충주시)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十八年 以國原爲小京”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19년(서기 558) 봄 2월, 귀족 자제와 6부의 부유한 백성을 국원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十九年 春二月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 以實國原”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진흥왕이 국원으로 백성을 이주한 시기는 558년이며, 우륵이 낭성에서 진흥왕을 만남 시점은 551년이다.
그렇다면 우륵이 나라가 어려워져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귀의한 시점은 558년 이후가 되어야 하며, 대가야 패망 후인 562년 이후로 추론해 볼 수도 있다. “나라가 어려워졌다”는 의미는 패망 전 나라가 어려워졌을 수도 있지만 대가야 패망 자체를 나라가 어려워졌다고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551년 우륵과 신라 진흥왕이 만난 사실, 신라인들이 우륵에게 가야금과 춤과 노래를 배워 552년 진흥왕 앞에서 공연한 사실, 557년 신라가 국원을 소경으로 삼은 사실, 558년 신라 백성들이 국원으로 이주한 사실, 562년 대가야가 패망한 사실, 우륵이 언제 지는 모르지만 진흥왕의 뜻에 의해 국원에 정착했다는 사실 만이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비록, 우륵이 대가야 패망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562년 이후 백제가 아닌 신라에 귀의했다고는 주장할 수 있으나, 그 이전인 551년 우륵과 진흥왕이 만난 사건을 귀의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모순이 있어 보이며, 이는 동맹국으로서의 만남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551년 대가야와 백제·신라는 삼국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국경지역인 낭성으로 집결했으며, 여기에 대가야 악사 우륵이 대가야 왕과 함께 동행함으로써 신라 진흥왕이 우륵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우륵을 국원으로 초청해 음악을 듣고 나서 감탄하여 신라인 계고·법지·만덕에게 가야금과 노래와 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으며, 552년 우륵에게서 배운 계고·법지·만덕이 진흥왕 앞에서 공연을 해 상을 받고, 이후 562년 대가야 패망 후 신라로 귀의한 우륵에게 진흥왕이 호의에 베풀어 국원에 머물게 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륵은 신라로 망명한 것이 아니다.

글·그림 박장호
주)대가야신문 대표
사)대가야향토사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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